오세현 교수님 인터뷰
학생 기자 활동을 통해 교수님들을 인터뷰하면서 개인적으로 느끼는 점이 많습니다. 바쁘신 시간 내주신 오세현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경력 소개
Q.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 가서 석사 과정을 했습니다. 독일에서 EU 스폰서 프로젝트인 ACTRANS를 했는데, 21개국이 모여서 컴퓨터 네트워크 Layer 1부터 Layer 7까지 망라하는 프로젝트였고, 저는 Layer 7 담당 PM으로 3년 정도 일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LG CNS 컨설팅 부문으로 들어갔고, 99년 벤처 붐 때 보안회사 스타트업으로 옮겼습니다. 5명 있을 때 조인했는데 지금은 SK쉴더스가 된 그 회사죠. 이 시기가 정말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행복한 시기였습니다. 이후 INZEN이라는 보안회사에서 6년간 부사장을 했고, 당시 매출 300억에 직원 350-400명 정도 규모였습니다.
2006년에 동부그룹 CTO로 갔는데, 43세였고 아마 대한민국 최초의 대기업 여성 임원이었을 겁니다. 솔루션 사업, 데이터센터, 해외 사업, 컨설팅 부문장을 하면서 동부그룹 전체 IT 어드바이스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IBM에서 신성장 사업을 했고, 2010년 KT 상무로 들어가서 전무까지 4년간 근무했습니다. KT 그룹의 전체 포트폴리오를 기반으로 새롭게 진입한 사업에 대한 구상을 했습니다. 2016년 SK그룹으로 옮겨서 8년 정도 있었습니다.
Q. 학계와 공공 부문 활동도 하셨다고요?
A. 아주대 시간강사, 건국대 겸임교수를 했고, 최근에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민간위원으로 참여했습니다. 대통령이 위원장인 헌법기관인데,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R&D 예산에 대한 심의를 하는 기관입니다.
협회 활동으로는 (사)모바일인증표준협회 회장, (사)오픈 블록체인 DID 협회 회장, (사)한국모바일산업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공학한림원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최근 코칭 자격증(KAC)를 따서, 대기업 팀장과 대학생을 코칭하고 있습니다.
독일 유학에서의 깨달음
Q. 독일 유학 경험이 어떠셨나요?
A. 한국에서는 사지선다형 시험으로 대학에 들어왔잖아요. 공부를 하다보면, 교과서를 거의 외우게 되었어요. 사지선다형은 문제와 사지의 연관관계만으로도 답을 맞출 수 있었어요.
그런데 독일에 가니까 그런 방법은 통하지 않았죠. 교수님이 작정하고 Chapter 1부터 시작해서 계속해서 Depth 있게 파고 들면, 본인이 그 분야에 대해 확실히 알지 않는 이상 교수님의 질문에 정확하게 답을 할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공부를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공부하는 방식이 달랐어요. 정확하게 알아야 하고, 어디서 어떤 질문을 받더라도, 모든 면에서,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지 않으면, 답하기가 곤란했습니다. 교수님과의 시험에서 답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공부하는 분야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Q. 한국에서의 사지선다형 시험에서 벗어나 구두 형식의 테스트를 진행하는 것이 낯설으셨겠군요.
A. 한국에서는 말로 시험을 본 경험이 많지가 않았죠. 제가 자랄 때만 해도 한 반에 인원이 엄청 많고, 전교생도 많았었거든요. 당연하게도 주입식 교육이 대부분이었고요.
사람의 지식이라는 건 100% 머릿속에 넣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걸 커뮤니케이션하면서 100% 밖으로 내놓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글로도 나오고 말로도 나와야 하는데, 대한민국의 많은 학생들이 그 부분에 약합니다.
예를 들어 독일어 시험을 보게 되면,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 중 한 명은 문법이 약해도 듣고 말하기에는 강한 케이스가 있었어요. 저는 문법에는 강했지만 듣고 말하고 쓰는 것에 비교적 약했구요.
Q. 석사 과정을 하시면서 어떤 점을 가장 많이 배우신 것 같나요?
A. Case by case겠지만, 한국은 교수님들이 논문 주제를 던져주는 경우가 많죠. 독일에서는 내가 직접 주제를 찾아서 세미나 발표를 해야 했어요. 매 클래스마다 학생들이 각자가 직접 선정한 주제로 발표를 계속 해야 했습니다. 석사 2년 동안 계속 "나는 이런 구조로 연구하겠다"고 제안해야 했죠. 연구주제를 학생이 제시하려면, 그 분야에 대하여, 상당한 공부가 필요합니다. 모르는 분야에 대하여, 어떻게 세미나 주세를 선정하겠어요? 이러한 경험이 저에게 문제를 빨리 파악하고 능동적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태도를 기르게 해줬죠.
그리고 석사 논문을 2개 쓰는데 1년짜리 하나, 그리고 2년 짜리 하나를 씁니다. 거의 박사 논문 급의 퀄리티가 나옵니다. 그 때는 상당히 힘들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시키는 일에 익숙했지, 제가 무언가를 직접 찾아서 해본 경험이 많지 않았거든요.
한국에 돌아왔더니 많은 임직원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일을 수동적으로 합니다. 제가 남들과 달랐던 점은 회사 프로세스, 글로벌 정세, 기술 트렌드를 보고 "우리의 자산이 어떠하고 처한 상황이 이러하니, 어느 분야로 어떤 식으로 진출해야겠다"를 먼저 능동적으로 제안하는 거예요. "문제점 파악이 남들보다 뛰어나고, 그 문제를 어떻게 fix할 수 있는지를 빨리 파악한다"는 것이 저의 장점입니다. 이 부분은 자기소개서에도 항상 쓰는 내용이기도 하구요.
또한, 제 권리를 제가 찾아서 주장하는 법, 그리고 FM대로 살아가는 법 등을 배웠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작은 것이라도 FM을 지키면서 살아왔거든요. 이렇게 살아갈때야 비로소 생존이 가능하고, 누구를 만나더라도 떳떳할 수 있다는 점을 배웠어요.
스타트업과 대기업 경험
Q. 유학 후 커리어 경험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LG CNS에서 일하시다가 스타트업으로 옮기셨다고 하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나요? 보통 작은 규모의 회사에서 큰 규모로 이직을 많이 시도하는데 반대의 경우인 것 같아 여쭤봅니다.
A. 저는 대한민국의 많은 프로세스나 경직된 문화를 이해하기 힘들었고 다소 반항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LG CNS에서 일할 때도 이러한 성향 때문에 남들과 부딪히는 케이스가 많은 사람이었어요. 그런 와중에 90년대 말, 벤처붐이 일면서, 좋은 조건으로 스타트업에서 제안이 왔어요. 당시에는 컴공과 졸업생들이 많은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제안을 받은 것 같아요.
가족들은 "애기도 있고 안정적인 직장이 낫다"고 말렸지만, 회사의 프로세스나 일하는 방식을 제가 생각하는대로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이직했습니다. 프로세스, 사람 평가, 채용,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제가 생각한대로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6년이 여러모로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습니다.
Q. 코칭과 인재 양성에도 관심이 많으신 것 같은데, 당시 직원들도 많이 배웠을 것 같습니다.
A. 처음에는 다소 강한 피드백에 힘들어 하는 직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3년 정도 지나면, 직원들이 "내가 성장했구나" 느껴서 고맙게 생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직원들은 다른 회사로 이후 이직했는데, 당시 상사들이 직원들에게 일을 어디서 배웠냐고 물어볼 정도로 좋은 실력을 갖췄었죠.
한 직원은 "모든 회사가 이렇게 잘 가르쳐주는 줄 알았는데, 딴 데 가니 이렇게 가르쳐주는 선배가 없다. 그때 배운 것 가지고 여태까지 버틴다"고 하기도 했죠.
Q. 당시 한국의 보안 시장은 어땠나요?
A. 95-96년 인터넷이 나왔고, 98년부터 사고가 터지기 시작했어요. Firewall이 처음 나왔을 때는 소위 말해 "담 쌓는 재료 만드는 회사"가 1등이었죠. 그 다음에는 담을 쌓았는데도 뚫고 들어오는 것을 감지하는 IDS(침입탐지시스템)가 중요한 기술이었죠. IDS는 전국 마켓 셰어 80%이상, 지자체 약 254개 중 대부분이 우리 제품을 썼어요. 그 때는 은행권을 포함한 여러 분야에서 보안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했던 때였죠.
보안 점검을 공짜로 해달라는 분위기에서 1억 원을 받고 컨설팅을 한 최초의 회사가 제가 다니던 회사에요. 서비스에 돈 낸다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죠. 그 때, 제가 최초로 보안 컨설팅 방법론과 프로세스를 정립했습니다.
Q. 동부그룹으로 가신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A. 동부 부회장님 스카우트였어요. 당시 동부그룹이 대대적으로 그룹 쇄신을 하려고, 외부 사람을 채용하던 시기였어요. 동부에서 IT를 기반으로 솔루션사업, 데이타센터 사업, 해외사업, 컨설팅을 하고자 하는데, 제 이력이 맞았었나 싶습니다.
Q. 어린 나이에 여성 임원으로서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A. 43살이었는데 동년배 상무님들이 다 55세 전후였어요. 2000년대 초에는 대기업 여성 임원이 거의 없었어요. 회의부터 시작해서 회식 등 여러 경우에 간간히 어려운 일들이 있었죠.
시간이 흘러 지금은 여성 임원들이 많아졌지만, 당시엔 힘든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실력으로 인정받으려 노력했고, 그 덕분에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Q. KT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A. 2010년도에 KT에 상무로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신사업본부자으로 입사해서, 신성장부문장을 했습니다.. KT 본체와 자회사 포트폴리오를 보고 KT 가 가지고 있는 자산을 가지고, 어떤 사업 영역에 진출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삼성역 SM 건물 보시면 돌고래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다양한 홀로그램을 보여주는 큰 전광판 보신 적 있나요? 2011년에 제가 처음으로 시도했던겁니다. 그 후에는 동대문에 롯데건물 맨 윗층을 레노베이션해서 홀로그램 빅뱅 공연 등을 시도했죠. 당시 창조 경영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뽑혀 장관님들이나 국회의원 분들도 다녀가시곤 했죠.
투자 프로세스도 바꿨어요. KT가 투자하려면 기본 15개월, 관련 부서가 20여개나 됐어요. 한번은 유망한 스타트업에 회사에 투자하고 싶었는데 저희 예산은 타 투자사에 비해 한참 모자랐습니다. 당시 회사 대표님이 3개월 안에 투자금을 마련해달라는 주면, 투자금이 경쟁사 대비 적더라도 KT 의 투자를 받겠다고 했습니다., 모든 방법을 강구해서 기간을 맞추었습니다. 사실상 KT가 신사업에 투자하는 프로세스 전체를 단축시킨 거지요.
Q. SKT에서는 어떤 프로젝트를 하셨나요?
A. Pass앱 아시죠? 제가 관장하던 앱입니다. 휴대폰 소액결제 사업도 제 관할이었습니다., 보안회사에서의 경험을 살려 여러 안전 장치를 많이 걸어둬서 보안 관련 사고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2016년부터는 블록체인 사업을 했는데 DID, NFT 마켓플레이스, Web3 지갑, 모바일 운전면허증 등을 개발했습니다.
Q. Passkey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됐나요?
A. 직원 하나가, 미래 기술이라고 장점을 들어 제안해서, 진행시겼습니다.SKT가 3년 전에 자체 개발해서 Pass에 적용했는데, PASSKEY 자체 개발은 한국 최초였습니다. 덕분에 보안 사고 이슈 없이 운영되어 왔습니다. SKT는 Passkey를 전체 인프라에 적용하는 것을 기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Q. SKT 가 서울대에 오시기 전 마지막 직장이었는데 일하시는 방식에 있어 예전과 다른 점이 있으셨나요?
A. 나이가 50 넘으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모든 건에 대해 퀄리티 100을 맞춰야 보고했는데, 이제는 10개 중 1개는 100점, 나머지는 50점에서 끝내자고 타협했죠. 6시 칼퇴도 처음 해봤어요.
직원 교육도 달라졌어요.피드백을 주고 일정 수준 이상 개선이 없으면 끝까지 붙잡고 교육하지는 않게 되었어요.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하기보다는 선택과 집중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일과 가정의 균형
Q. 두 아이를 키우시면서 독일에서 유학을 하셨는데 상당히 힘드시지 않으셨나요?
A. "모든 일은 지나간다"는 마음가짐이었어요. 10분만 누가 애를 봐줬어도... 자는 애기 깨워서 옷 입혀서 4층 계단 내려가서 장 보고 오는데 1시간 걸렸어요. 뛰어가면 5분인데요.
"누가 너더러 하라 그랬냐"는 소리 듣기 싫어서 찍소리 못하고 다 해냈죠. "누군가 했다면 나도 할 수 있어"라고 생각했고, 내가 못해서 후배들한테 기회가 안 가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했죠. 누군가의 모범이 되거나 롤모델이 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남에게 피해를 끼치기 싫었던 것 같아요.
Q. 자녀가 두 분인데도 임원으로 바쁘게 활동하시느라 자녀 교육에 힘이 많이 드셨을 것 같습니다.
A. 알림장도 제대로 못 봐줬고, 입학식, 졸업식 정도 학교에 간 것 같아요. 수시,정시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고, 아이들이 입시 준비를 알아서 해야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무지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애들이 고생해서 대학 갔어요. 회사 일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유능했을지 몰라도 아이들 교육에는 시간을 많이 못 썼으니까요.
하지만 제일 신경 쓴 건 화목하고 따뜻한 가정이었어요. 집에 오면 행복한 가정. 우리 딸이 "모든 집이 우리 집 같은 줄 알았는데, 우리 집이 좀 다른가 봐"라고 해요. "우리 집 같은 집 만들고 싶다"고 하더군요.
서울대에서의 도전
Q. 서울대에 오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우리나라가 스타트업 육성한다고 돈을 엄청 썼는데 유니콘 기업이 됐다는 얘기를 듣기가 힘들어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하면서 R&D 예산을 엄청 뿌리는데, 적당히 하다가 폐업하는 케이스가 너무 많더군요.
여기 와서 창업 프로세스, 창업 생태계 현황을 파악하고 어떻게 서포트할 수 있는지 연구하고 싶어요. 학생들이나, 교수님들이 창업에 관심있는 분들이 꽤 있을텐데, 그분들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CS 분야에서 오래 일했던 제 경험을 살려 학생들에게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구요.
Q. 12월에 리타이어하고 코칭 자격증을 따셨다고요?
A. 150시간 정도 코칭했어요. 컨설팅은 문제 해결, 카운셀링은 과거에 대한 심리상담, 멘토링은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라면, 코칭은 원칙대로 하자면, 코칭하는 사람이 판단하면 안 되고, 직접 솔루션을 주지 않아요. 상대방의 100% 잠재력을 믿고 끌어내는 거죠.
한국 교육제도는 남과 비교하게 만들고, 부모의 희망하는 인생을 살도록 종용해요. 일종의 가스라이팅이 아닐까 생각해요. 젊은 사람들이 "부모한테 인정받고 싶다"는 얘기를 해요. 그에 앞서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지 생각하고, 알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각자가 스스로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면 좋겠어요.
어떤 사람은 승진해서 임원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소박하게 행복한 가정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각자의 행복의 기준은 다르니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후배들을 위한 조언
Q. 공전원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A. 'Attitude'가 가장 중요해요. 학벌이나 스펙은 보조입니다. 일을 대하는 태도, 동료들과 협업하는 자세, 몰라도 찾아가면서, 문제를 풀려는 자세 등이 중요합니다.신입사원한테는 "인사만 잘해도 50% 먹고 들어간다"고 해요. 요즘 직원들은 엘리베이터에서 눈을 마주쳐도 인사를 하는 직원이 적어요.
30대가 넘으면 나만의 인생관이 있어야 해요. 자기가 목표지향적인지, 삶을 밸런스 있게 가져가는 사람인지 알아야 합니다. A4 용지 2장에 "나는 어떤 사람인지, 뭘 원하고, 언제 행복한지" 써보세요.
Q. 팀장급 이상 인원들에게는 어떤 조언을 주시고 싶은가요?
A. 평가하고 관리하려 하지 말고, 직원들에게 성장 기회를 팀장 권한 내에서 최대한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으면 본인들이 알아서 해요. 마음이 동하지 않는데, 일을 받으면, 시킨 일만 합니다. 마음이 동하면, 시킨 일 이외에, 본인들이 아이디어를 내서, 더 많은 것들을 해 냅니다. 오히려 본인이 주도적으로 다음 사업 아이템이나 새로운 프로젝트를 들고 오기도 하구요.
본인이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롤모델을 정하고, 그 사람의 장점 중 내게 없는 걸 파악해서 1년 동안 나의 부족한 점을 어떻게 개선해서, 나의 롤모델과 비슷하게 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액션 플랜을 세워보세요. 한 직원이 "발표 잘하고 싶다"고 해서 1년 내내 발표 기회를 주고 본인 스스로가 발표하는 모습을 녹화하고 점검하며 발표에 계속 노력을 기울였어요. 그랬더니 지금은 그룹사 임원 대상으로 발표를 하고 다니더군요.
Q. 워라밸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가요?
A. 2014년까지 밤 11시쯤 퇴근하고도, 또 노트북 켰어요. 50이 넘어서야 "10개가 있으면 10개 다 100점 맞출 필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최근에 팀장 한 명을 코칭하면서 "주말에 뭐 하냐"고 물으니 "월요일 준비"라고 해서... "서울시립사진미술관이라도 30분만 보고 와라"고 했어요. 나중에 서울시립미술과에 다녀와서는 "가족과 대화 소재가 많아졌다. 물방울 보면서 김창열 작가 생각났다"고 메일을 보내더군요.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A. 저는 상대적으로 행복한 게 많아요. 독일에서 있을 때는 10년간 집밖에서 커피 한 잔 안 마셨거든요. 1000원짜리 커피도 아까워서... 지금도 외부에서 커피를 사 먹는 일이 드믈지만, 가끔 호텔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내가 이런 것도 편하게 할 수 있게 되었구나, 생각합니다. 힘든 시간에 내가 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이 있었기에, 지금 누리는 것들에 대해 더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마흔이 넘어서는 사회에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마음이 서울대로 오게 된 이유 중의 하나인 것 같아요.
공전원 학생들과 인생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다른 시야로도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요. 저는 학생들 만나고 싶어서 왔거든요. 1박 2일 워크샵 같은 활동도 같이 참여하여 학생들과 친해지고 교류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세상을 사는 방법은 다양하고 직업적 성공만이 인생의 성공이라고 하긴 힘들어요. 직업적 성공을 통해 얻은 프라이드는 자신의 프라이드가 아니라 세상이 준 프라이드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준 프라이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프라이드가 중요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