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tGPT가 난리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놀랍기 때문이다. 비슷한 정보를 찾아서 뱉어내는 정도가 아니라, 고차원 질문에 대해서도 논리적이고 명료한 에세이를 써낸다. 나는 칸트가 인공지능에 미친 영향에 대해 물어 봤는데, 틀림없이 A+를 받았을, 분량도 적절한 멋진 에세이를 써냈다. 같은 질문에 대해 수학으로 설명해 달라고 하니 대학원 수준의 전문적이고 멋진 글을 써 내었다.
이 정도이니 정말이지 일상의 이야기부터 고수준의 철학적 주제로까지 대화가 가능하다. 몸상태를 이야기하니 의학적 조언까지 내놓는다. 검색보다 훨씬 편하다. 말이 통하면서도 묻는 말에만 대답하니 그야말로 환상적인 대화상대가 아닐 수 없다. 사람이 알아듣는 글만 잘 쓰는 것이 아니라, 기계말인 프로그래밍까지 척척 해낸다. ChatGPT 그 스스로가 프로그래밍의 결과이니, 이는 스스로 재생산, 즉 번식이 가능하겠구나 짐작할 수 있다. 번식은 진화를 의미한다.
인공지능이 이정도라면, 우리 인간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현존하는 세상의 지식 대부분을 이해하고 있는 인공지능이 등장한 마당에, 이제 무엇이 인간을 가치 있고 특별하게 하는지,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이고 존재여야 하는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인간다움을 이야기 하자면 자연스레 2,500년전의 공자님과 마주하게 된다.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를 제자들이 적어 놓은 신약의 복음서처럼, 논어는 공자님이 하신 이야기를 제자들이 묶어 놓은 책이다. 논어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배우고(학) 때때로 익히면(습)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기절초풍할 문장이다! 인공지능의 정수는 결국 학습의 수학적 정의가 가능해 졌음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컴퓨터에게 시킬 수 있는 것이다. ChatGPT는 이 학습의 수학적 정의가 컴퓨터로 실증된 예라 하겠다. 홀리바이블의 창세기에 해당하는 공자님의 첫 말씀이 인공지능의 핵심 원리를 말하고 있다. 아아!
오늘날 한반도의 문화와 관습, 정신 세계를 빚은 것은 상당부분 수천년을 이 땅에 흘렀던 동양철학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신기할 만큼 그것을 다루지 않고 오히려 피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식민지와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마당에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익혀야 한다고 결단을 내렸을 것이라 이해가 가기도 하고, 나름대로 의도했던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한자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지 않아 읽지 못하게 되고 더 이상 사서오경도 가르치고 배우지 않지만, 좋건 싫건 간에 우리가 한국인스럽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대부분 삼국, 고려를 거쳐 조선으로부터 내려온 것이다. 조선은 주자학의 나라였다.
서양을 빚은 두 책인 구약과 신약의 관계처럼, 논어에 현대적 해석을 붙인 것이 주자학이다. 주자는 공자님이 말씀하신 배움(학)이란 따라하기, 본받는 것이라고 하였다. 아! 정말이지 머리를 세게 때려 맞은 것처럼 놀랄만한 통찰이다. 왜냐면 학습의 수학적 정의라는 것이 어떤 이상적 대상과 나와의 거리를 끊임없이 좁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깨달은 사람을 뒷사람이 따라하며 닮아가는 것이다. 끊임없이 모범을 찾아 닮아가며 매일 매일이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조선시대 내내 치열하게 논의했던 이기론의, ‘기’는 우리가 들여 마시는 공기의 기로 무질서해 보이는 자연현상이자 오늘날의 데이터에 해당한다. 리는 원리, 이성의 '리'로 그 자연현상을 그렇게 만든 근본 원리에 해당한다. 인공지능이 결국 해내는 것은 자연현상, 즉 데이터를 설명하는 간단한 설명과 원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더 놀라운 점은 리와 기가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국기 한가운데 딱 하니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 국기는 인공지능 시대를 상징하고 있다.
시대가 변했는데, 똑같이 해서야 제대로 살아남을 수가 없다. 이번학기 서울대 창의성 교육을 위한 교수모임의 김세직 교수님의 ‘한국 경제를 위한 창의적 아이디어’, 나용수 교수님의 ‘해체와 재창조’라는 창의성 과목을 기초교육원을 통해 개설 되었다. 이들 과목의 수강 정원이 금새 차버려, 수강정원외 신청까지 받았다. 한 학생이 수강외 정원 신청을 하며 적은 사유는 대략 다음과 같다.
“ChatGPT를 써보니, 결국 인간이 살아 남기 위해서 가져야 할 것은 인공지능이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내는 창의성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ChatGPT 시대에 인간다움 그리고 대학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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